좋은 글·그림
ㆍ작성자 深忖
ㆍ작성일 2021-03-20 (토)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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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수 당 (花樹堂)과 편액

화 수 당 (花樹堂)


  화수당(花樹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위치한 풍산김씨(豊山金氏) 문중의 회합공간 편액이다. ‘화수는 친족의 모임을 뜻한다. 당나라 위장(韋莊)이 화수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잠삼(岑參)위원외가화수가韋員外家花樹歌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 [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史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고 한데서 취한 말이다. 편액의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쓴 초서체이다.




완옹(阮翁)이라 쓰기도 했지만 이 두 글자를 구성한 특유의 방식만으로도 추사 김정희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화수당 세 글자의 관계를 균등하게 했으니 이 두 글자로 마무리를 했다. 추사에게 공간구성이란 글자의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다. 공간과 관계가 추사서법에서 하나의 축이라면 문자의 운용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편액에 쓴 자의 변용이 그 사례이다. 그동안 조선 서단에서 금석문을 연구한다 해도 한 글자를 통으로 익혀 사용하였을 뿐 한 글자에서 편방의 변화 흐름을 탐구하여 이를 서법에 활용하지 못한 점을 비판한다. 문자가 한 번 정해지면 누구도 감히 바꾸지 못한다는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추사 서법에서 문자 변용에 대한 일단의 견해이다.


팔연오계(八蓮五桂) 이후 문과 급제자 중 죽봉(竹奉) 김간(金侃, 1653~1735), 독산(獨山) 김종규(金宗奎, 1765~1830), 낙애(洛厓) 김두흠(金斗欽, 1804~1877)은 심곡공의 후손이며, 왜적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추강 김지섭(秋剛 金祉燮)의사는 설송공의 후손이다. 현재 오미동에는 학호 후손이 10여호, 심곡공 후손이 40여호, 설송공 후손이 30여호가 살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는 유연당 9부자가 글 읽던 죽암서당, 위패를 모신 추원사, 후손들이 공부하던 도림강당, 풍산김씨종택(민속자료 38), 영감댁(민속자료 39), 참봉댁(중요민속자료 179), 죽봉사당, 마을회관으로 사용되던 화수당 등 많은 고건축이 남아 있다.

오미마을 입구에 풍산김씨안동지구화수회간판이 걸린 조그만 건물이 보인다. 화수당은 오미마을에 신교육을 연 오릉학술강습회로 한학자 김이섭이 세운 사설학원이다. 죽암서실, 도림강당, 화수당은 이전하였으며 마루방 들보 중앙에 게시된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 하며 1925년 재단재산으로 풍북사랍보통학교(붕북초등)를 세웠고 지금은 동사(洞舍)이자, 화수회 장소로 자제들을 가르치는 양몽재로 활용하고 있다. 학남유거(學南幽居 영감댁)1759(영조 35)에 규장각직각 김상목이 자형으로 안채 8칸을 세웠고 1826(순조 26) 손자인 참지중추부사를 지낸 학남 김중우가 자형의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학남의 아들 낙애 김두흠이 승정원 동부승지 벼슬을 지냄으로 영감댁이라 부르게 되었다. 허백당종택 입구 좌측편에 위치한다. 학남은 유연당의 넷째 심곡 김경조의 7세손인 미곡 김종석의 장자이다. 학암고택(鶴巖古宅 참봉댁)은 미곡 김종석의 둘째 학암 김중휴가 분가할때 건립한 주택으로 학암이 조산대부 제릉참봉을 지냈기 때문에 참봉댁이라 불렀다.

5칸 행랑채에 솟을대문이 있고 마당을 지나면 자형 안채가 남향을 하고 오른쪽 곳간이 4칸이 병렬배치 마당 동편에 3칸의 사랑채가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종택 입구에는 독립운동가 근전 김재봉(심곡의 13세손)의 어록비가 있으며 1917년 오릉강습소를 개설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만주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1920년 만주일보 폐간 후 독립신문 등 문서를 대구지역에 보급시키려다 체포당해 19219월 출옥 후 만주로 망명했다. 19221월 모스크바극동민족대회 참석했으며, 1923년 꼬르뷰로(고려공산당 중앙총국) 참석해 이해 5월 꼬르뷰로 국내 파견원으로 선입되었다. 19254월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개최했고 12월 일본경찰에 체포당해 징역 6년을 복역했으며, 193111월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 1944322일에 별세하였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006년에 어록비를 제막했다.

오미동의 풍산김씨(豊山金氏)는 고려 중기 인물인 김문적(金文迪)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안동에서 지주적 기반을 형성하게 된 배경은 김안정(金安鼎)의 둘째 아들인 김자순(金子純)이 안동 풍산 오릉동(지금의 오미동)에 살기를 정한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순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사환으로 서울에 거주하였는데, 허백당 김양진이 오릉동을 자주 출입하였다가 그의 아들 잠암 김의정이 을사사화 이후 안동으로 완전히 낙향하여 오릉동을 오무동으로 바꾸어 정착함으로 인해 명망세족으로 성장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런데 정치적 환멸을 느낀 그는 아들에겐 벼슬하지 말고 농사나 지으면서 살라는 의미로 이름조차 ()’으로 바꾸었다. 손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은 도연명(陶淵明)음주飮酒시의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캐노니 저 멀리 아득히 남산이 보이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취하여 이웃 마을에 사는 김윤안(金允安)과 서로 호를 나누어서 김윤안은 동리(東籬)라 하고 김대현은 유연당이라 자호하기도 하였다. 김대현은 아홉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에 여덟째 김술조(金述祖)는 요절하였고 나머지 여덟 명은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1572~1630)·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 15771648)·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 1581~1637)·심곡(深谷) 김경조(金慶祖, 1583~1645)·광록(廣麓) 김연조(金延祖, 1585~1613)·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학음(鶴陰) 김염조(金念祖, 1589~1652)·설송(雪松) 김숭조(金崇祖, 1598~1632)이다. 특이하게도 8형제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들 중 5형제(봉조·영조·연조·응조·숭조)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고 마을 이름을 오무동에서 오미동으로 고치게 하고 마을 앞에 봉황려라는 문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부터 오미동의 풍산김씨는 미김(美金)으로 불리며 명망 있는 재지사족으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8형제는 모두 현달하여 학호파·망와파·장암파·심곡파·광록파·학사파·학음파·설송파 등으로 분파되어 각기 파조를 이루었다. 8형제 가운데 김봉조·김경조·김숭조는 그대로 오미리에 세거하였고, 김영조·김창조·김응조는 영주에 살다가 그 후손들 중 제주목사를 지낸 노봉(蘆峯)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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