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봉(金在鳳)
고종28,신묘 1891.5.19 ~일제강점35 갑진
19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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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강습소•고려공산당•신사상연구회•화요회•조선공산당)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주서(周瑞). 호는
근전(槿田).
출신지는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현 풍산읍 오미1동).
공은 심곡공의
12대 손인 휘 문섭의 맏자재로 태어나 소년시절에는 한학을 수학하고, 1912년
학업을 마치자 곧 독립운동에 투신 하였다.
국내 각지를 돌아 다니며 국권 회복을 위한 동지를 규합하여,기미 3.1운동시 앞장서 농민들을
지도 하다 일경의 눈을 피하여 기자로 활동중 독립운동 문서를 전달하다 옥살이를 하였다. 츨옥 후 1922년 31세때 소련 모스코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한인학교 교사로 있다가, 11월 상해및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인 러시아
이르끄쯔끄 혁명자대회에 참석 하였다 |
김재봉(金在鳳) |
독립을 위하여는
이념 보다는 힘이 키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공산당을 조직, 걷으로는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1925년 4월17일 처음으로 조선 공산당조직 1차 공산당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이듬해인 1926년 신의주 학생
사건으로 조직이 발각되어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여 조직이 거의 와해되었다. 이것을 역사는 '조선 공산당 사건'이라 한다.
공은 조선공산당의 제1차
책임비서를 지낸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태두였으며,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조국 독립을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1908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를 졸업한 후 1909년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專習所)에 입학하여 염직과를
3년간 수학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1917년 풍산 오미동에 오릉강습소를 개설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9월경 『만주일보(滿洲日報)』 경성지사 기자가 되었지만, 1920년 말 신문사의 폐지와 동시에
퇴직하였고, 이 무렵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북교통부장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된 안상길(安相吉)과
서울에서 만나, 그로부터 『독립신문』을 비롯한 많은 문서들을 받아 대구지역에 파급시키려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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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이 설립•운영한 오릉강습소-현 화수당> |
1921년 9월에 출옥한 그는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 시기 김재봉은 『마르크스 자본론』•『사회주의학』•『레닌주의』•『진화』
등과 같은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여 사상과 활동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후 그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같은해 11월에는 베르흐네우친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하였고, 대회 결렬 이후에는 치타에서 소집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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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국동 인민대표 회의에 파견한
김재봉 위임장(1921.10.24)> |
1923년 블라디보스톡 꼬르뷰로(조선공산당중앙총국)에 참가, 5월 꼬르뷰로 국내 파견원으로 선임되어
국내에 들어온 그는 신사상연구회 조직에 참여했다. 또한 그 해 8월 서울에서 비밀리에 꼬르뷰로 국내부를
설치하고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1924년 2월 꼬르뷰로 국내부를 대표하여 ‘통일 조공’ 결성을 협의하기 위해
각파 공산주의자그룹의 대표자 회합인 ‘13인회’에 참석했다. 10월 정재달(鄭在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며, 이 무렵 화요회를 이끌었다. 그리고 『조선일보』기자로 재직하면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작업을 주도해 나갔다. 1925년 4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 개최를 주도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신의주 학생 사건으로 조직이
발각되어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여 조직이 거의 와해되었다. 이것을 역사는 '조선 공산당 사건'이라 한다.
그러나 그해 12월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1년 11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1944년 3월 3일 사망했다.
▣「신원카드」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집』 1권 《조선일보》1924.10.13, 1926.7.25
1928.2.3, 2.14, 3.1, 1929.11.17, 193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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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 생가 - "현 학암고택" 문화재로 등록> |
정부는 2005년3월1일 : 독립운동으로 인정 국민훈장 애국장을 수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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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4월6일 고유제 |
공의 묘소는 경북예천군
호명면 직산1리(동막)에 위치
근전의 친필 금강산 여행서첩 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