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흠 金舜欽
김순흠 金舜欽
자는 치화 穉華, 호는 죽포竹圃. 일찍부터 문명을 날려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 가 여러 차례 벼슬을 권유했으나 거절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자 허위(許蔿), 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장들과 함께 했으며 1896년 안동과 예천, 의성을 다니며 의병 모으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의병해산의 조칙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열중하며 10여 년을 보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아들 김낙문(金洛文)을 이강년에게 보내 의병항쟁에 동참시키고, 자신은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 배포하였으며 의병자금 조달에 노력했다.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고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가하여 민긍호, 이강년 등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지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의병운동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순흠은 일본이 지배하는 땅에서 생산된 곡식은 먹지도 가꾸지도 않겠다는 의지로 1908년 9월 3일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죽어도 빈소를 차려 곡은 하더라도 음식은 올리지 말라고 이르며 왜적이 있는 한 죽어서도 음식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단식 23일 만에 예천군 감천면에 있는 후손 김병욱(金秉旭)의 서실에서 순국했다.
저서에 〈죽포문집 竹圃文集〉이 전한다. 1973년 예천 남산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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