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을 빛낸 선조들 > 허백당 문중 > 오미동의 터전을 개척한 인물        

 

  잠암 휘 의정. 화남 휘 농. 가학의 전통을 수립

 
 

장암 휘 의정 (潛庵 諱 義貞-연산1, 1495 ~ 1547)은 허백당 휘 양진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한양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21세, 중종11년(1516) 진사시에 합격하고, 31세 중종21년(1526)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오르고, 중종25에는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어, 동궁이었던 인종에게 학문을 강론함에 인종이 예를 갖추어 공에게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공의 중망이 높아지자  김안로와  박홍린 등의 모함으로, 중종26년(1531) 파직되어 고향 오릉동 별장으로 내려왔다. 중종32년(1537) 김안로가 사사된 이후 공조정랑, 예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등을 역임하고, 인종1(1545)년 종부시 첨정이 되었다. 그 해 인종이 승하하자,  지난날 인조로부터 국사의 대접을 받았던 성은에 보답하지 못함을 애통해 하며 고향에 동아와 자연을 벗하면 소요자적했다.  이때, 호를  幽敬堂에서  잠암으로 고치고, 마을 이름을 오릉동에서 오무동으로 바꾸고, 아들 이름 또한 농사나 지으며 살아라는 의미에서 農자로 고쳤다고 한다.
春은 묘갈명에서  공은 천품이 맑고 강직하여 위세와 이익에 흔들림이 없었고, 진실로 의리에 합당하면 곧 용감하게 힘써 행하여 비록 孟賁과 夏育 같은 장사도 뜻을 뺐을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또 정성으로 학문을 좋아하여 심경,근사록,자경 등의 서책을 즐겨 읽고, 소학을 신명으로 받들였으며, 공의 모든 행실은 이로부터 나왔다고 적고 있다. 柳台佐가 쓴 善權齋 金瑞雲의 行狀에 따르면, 의정은 문장과 절의가 뛰어나 退溪, 淸陰, 唱酬 와 같은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추종을 받았다고 한다.
장암공이  남긴 유작 중 『踐形賦』와 『紀綱賦』는 東文選에 실릴 만큼 명문이며, 그 내용 또한 성리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그는 『천형부』에서 사람은 천의 기운을 품부받고 천의 형상을 닮았으며,  음양오행의 웅취는 실로 도의 정미함을 갖추고 있으니, 자신을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속일 수 있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형체가 기를 타면 사람이 있고, 형체가 기를 떠나면 사람이 없으니, 몸은 곧 성이며 성은 곧 몸이기 때문에 형체를 알지 않고는 天을 알 수 없다고 하여, 일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또 자신의 성을 다하면 형상은 스스로 따라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덕 다하지 않는 실천은 한갓 허공에서 유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정암 조광조는 그의 유작 踐形賦을 일고 “말의 이치가 지극하게 갖추어져 있고 참으로 경학중의 사람이다”고 했다. 湖陰 鄭士龍은 그의 紀綱賦를 읽고 “이 책의 의논이 심히 아름다우니 가히 평일의 실천이 독실함을 증험할 수 있다”고 했다. 공은 河西 金麟厚와 도의로 사귀었고, 퇴계 이황과 더불어 시를 주고받으며 所懷를 자주 나누기도 했다.

華南 諱 農(중종29, 1534~선조24, 1591)은 의정의 독자로 3세 때 어머니 안동김씨가 별세하여, 조부의 집에서 자랐다. 어려부터 자질이 뛰어났으나, 의정공이 몸이 허약함을 걱정하여 글공부를 독려하지 않았으나, 점점 장성하여 스스로 힘을 다하여 문장의 기운이 넘쳐나게 되었다고 한다. 14세에 부친 의정공이 별세했다. 의정공은 아우 순정공에게 조상의 산소가 영남에 있으니, 農이 크면 영남으로 장가를 들이라고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농은 선친이 돌아 가신지 7년 후인 1554년 世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세회는 1516년 식년 생진시에 선친과 함께 동반 합격한 8家의 자제들의 詩會라고 할 수 있다.  농은 선친에 대한 애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향내에 거주하는 나머지 7家의 자제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선인들은 진사에 동반 합격하여 벌써 형제처럼 되었으니, 한 향내에 살고 있는 후예로써 어찌 정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없던 모임을 만들어서 나중을 위하여 길이 격려하고자 한다”고 하고,  “선인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 하기 어렵지만, 서로 권하고 격려하여 세인의 흉은 듣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했다. 이 모임에 참가한 인물들은 민진서(51세), 정전(45세), 배천석(44세), 배천우(39세), 장수휘(39세), 한우(39세), 정균(38세), 정일(34세), 배천주(34세), 조경연(34세), 조경삼(31세), 금응선(29세), 금응림(28세), 금응남(23세), 조경사(23세), 김농(21세), 조경상(16세), 등이었다. 농은 모임에서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모두들 공의 학문과 인품에 감복하여, 자제의 훈도를 부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공은 이복원, 배삼익 등과
伴鷗亭 시회에 참여하여 도의로 교유했으며, 저술로는 華南遺稿 2권이 전한다.

이렇게 허백당 문중은 의정과 농을 거치면서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여 청렴하고 강직한 덕행을 더했으며, 높은 학문적 성취 또한 이룩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들의 중망을 받는 가문이 되었다. 이러한 터전 위에서  유연당공 휘 대현과  그 자제들은 풍산김씨 중흥기를 이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