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백당 문중

풍산 김씨는 고려조의 명문세족으로 고려조에서 判相事를 역임한 文迪을 始祖로 대대로 송도(지금의 개성)에 거주하였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어 송도의 사족을 한양으로 이주 시키는 정책을 취함에 따라 8세조인 直長公 諱子純 (공민왕16년 1367~?)대에 이르러 한양 壯義洞에 정착했다. 鶴沙  諱 應祖 公이  저술한 『追遠錄』(1653)과  鶴南 諱 重佑公이  저술한『五美洞誌』(1780년대에서 1849년 사이 저술), 그리고 鶴 諱 重休公이  편찬한『世傳 畵帖(1850년대 편찬)에 근거할 때,  한양에 거주하던 풍산김씨가 처음 오미동에 거주한 것은 조선 초기 직장 공 휘 잔순으로부터하고 한다.  자순공은 고려조에서 三司 左尹을 지낸  安鼎의 둘째 자제로 태어나, 조선조에서 軍器寺 直長을 역임했다.  이후 자순의  백형 병조판서 子良이 조선 건국초기에 발생했던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1402년 유배지에서 賜死되고,  그 화(禍)가  자손공에게 미쳐 오미동(당시 五陵洞)에 내려와 집을 짓고 기거 하다가  병으로  별세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우리김씨가 오미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시조인 문적의 증손,  高祖 諱 鍊成이 계림(경주)에서  풍산현 石陵村에 옮겨 살면서 오릉동에 별서를 두면서 부터 라고 한다.  자순의 후손들은  관직 생활로 인해 주로 한양에서 살았지만,  別待衛를 역임한 從石(태종9, 1409~세종21, 1439)과 珍山郡守를 역임한 徽孫(세종20, 1438~중종4, 1509)을 거쳐 虛白堂 諱 楊震에  이르러 선조의 묘소와 별장이 있는 오릉동에  자주 출입했고, 허백당의 아들  潛庵 諱 義貞(연산1, 1495~명종2, 1547)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동명을 五陵洞에서 五洞으로 개명하고 은거했다.

의정은 중종21년(1526)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사서를 역임하는 등 조정의 중망을 받았으나, 1531년 당시 권세를 누리던 金安老 와 朴洪麟등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오릉동 별장으로 내려왔다. 이후 김안로가 사사되고, 중종 36년(1539)잠시 예조 정람겸 춘추관 기주관 등의 관직에 올랐으나, 1545년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바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모든 교유도 끊고 시문으로 소요자적하면서 지냈다. 의정은  이때 호를 幽敬黨에서 潛庵으로 고치고,  아을 이름도 五陵洞에서 五洞 으로 바꾸었으며,  하나뿐인 자제의 이름을 관직에 나가지 말고 농사나 지으며 살라는 의미에서 農자로 고쳤다고 한다.

華南 農(중종29, 1534~선조24, 1591)은 여러 번 관직에 나오라는 천거가 있었지만, 부친의 유훈에 따라 나가지 않다가 만년에 가세가 어려워 준원전 참봉, 용궁현감, 장예원 사의 등을 역임했다. 그는 大賢,상현,동현,애현,풍현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선조 9년(1576) 용궁현감으로 재임할 당시 장자 대현헤게 오무동 종택을 지금의 영감댁 터에서 현재 자리로 중수하여 옮기도록 했다. 농은 선조24년(1591)향년 57세의 나이로 한양 장의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悠然堂  諱 大賢(명종8, 1553~선조35, 1602)公은  화남공의  장남으로  오미동  풍산김씨의 터전을 확고하게 구축한 선조이다.  공은 선조 15년(1582) 29세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나이 42세에 이르러 성현도 찰방에 부임하고 48세에 산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공은  36세 되던 해에 영천(지금의 영주) 봉향리에 유연당을 지어 이주하고, 두 번에 걸쳐서 영주 伊山書院長을 지내기도 했다. 일찍이 부친의 뜻에 따라 중수 이전했던  고향 종택이 선조 25년(1592)임진난에 일어난 화재로 전소되자, 대현은 선조 33년(1600) 다시 고향의 종택을 중건했다. 공은  아들 구형제를 두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난 여덟째 述組를 제외한 팔형제가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중 5형제가 대과에 급제하는 등  풍산김씨의 중흥기를 이룩하게 되었다.  당시 인조 임금은 1629년  八蓮五桂之美라고 칭찬하고 마을 이름을 五美洞이라 지어 내려주었다고 한다. 공의 자제들은  한양 장의동, 풍산 오미동,  영주 봉향 등지를 오가며 학문에 정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팔형제 가운데 첫째 鶴湖 諱 奉祖, 넷째 深谷 諱 慶祖,  여덟째 雪松 諱 崇祖 公은 오미리에  세거했고,  둘째 忘窩 諱  榮祖, 셋째 藏庵 昌祖, 여섯째 鶴沙 諱 應祖 公은 영주에 살다가  그 후손들이 봉화 오록으로 옮겨 세거하고 있다.  다섯째 廣麓 諱 延祖公의 후손들은 예천 벌방리에 터전을 잡았으며,  일곱째 鶴陰 諱 念祖公은 재 종숙 谷 諱 壽賢公의 系子가 되어  경기도 파주로 이전했다. 한편 허백당공의 둘째 자제 愼庵 諱 順貞(연산3, 1497~선조10, 1577)은  경상도 인동현감, 경산현령, 영천군수 등을 역임했는데, 아들 삼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번성한 일문을 이루었다.  첫째 아둘 西村 諱 鎭(중종17, 1522~선조24, 1591)公은  명종4년(1549)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경기도사로  나갔을 때,  붕당의 모함으로 강원도로 유배되었다가, 蘇齋 盧守愼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려나고, 栗谷 李珥의  상소로  다시 복직되어  전라도 김제군수에 임명되었다. 이후 서촌 김진은 율곡의 권유로 율곡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에 정착하여 터전을 잡았다.  그 후손들은 경기도 파주(김진의 장손 英胤), 황해도 연백(김진의 둘째 손자 應胤), 평북 벽동(순정의 둘째 자제 鎛), 충남 당진(순정의 셋째 자제 鐥)등지로 터전을 확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