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봉집 (蘆峯集)

 
蘆峯 金의 문집. 木活字本, 金宗烋, 1863, 4卷2冊:四周雙邊, 半郭 21.8×14.3㎝, 10行20字, 上2葉花紋魚尾;31.5×20.5㎝.

『蘆峯集』은 서문은 없고, 권말에 宗烋의 발문이 있다. 발문에 의하면, 문집간행을 위해 시종 일을 주관한 사람은 宗君 泰璜과 堂弟 宗杰이다. 1807년(순조 7) 처음 편집할 당시에는 본집 2책에 만사와 제문, 그리고 家狀을 합한 부록 1책으로 되어 있었는데, 몇 십 년이 지나 소장자인 冑孫 金重器가 편집의 문제점을 제기하여 다시 字句를 刪正하고 잘못된 곳은 補入하여 부록을 합쳐 2책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그 뒤 30여 년이 지난 1863년(철종 14) 3월에 梧川書院의 士林들과 합의하여 5월에 마침내 活印하게 된 것이다.

卷1은 詩 237수만 수록되어 있으며, 卷2는 疏 3편‧啓辭 1편‧議 1편‧書 18편‧잡저 4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卷3에는 序 4편‧記 4편‧跋 1편‧상량문 9편‧제문 18편이 실려져 있으며, 卷4는 부록으로 家狀‧墓誌銘‧輓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편지글에는 喪禮에 대한 언급이 많이 보인다. 또한 議 중에 「良役收議」는 당시 良役制度의 폐단과 대책을 밝힌 것으로 1750년 균역법이 실시되기 전 양역제도의 여러 가지 폐단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김정(金政)

1670~1737(현종 11~영조 13). 字:士達, 號:蘆峯, 本貫:豐山, 父:輝鳳, 母:奉化琴氏, 居:安東.

조선 후기의 학자. 高祖는 영주 鷗湖書院에 제향된 悠然堂 金大賢이며, 曾祖는 학문과 문장으로 사림의 중망을 받았던 鶴沙 金應祖이며, 조부는 吏曹參議에 증직된 時行이다. 아버지는 輝鳳(1643~1683)은 副司勇을 지냈고 아들이 原從功臣에 녹선되었기 때문에 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봉화금씨로 惺惺齋 琴蘭秀의 증손녀이자 목사 愷의 손녀이며 참봉 聖徵의 딸이다. 영주 鶴沙精舍에서 태어난 그는 3세 때 부친이 역병에 걸리자 흙으로 떡을 빚어 하늘에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며, 또 이웃에 소 한 마리를 빌려 아버지의 기운을 보양할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683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1685년에 상을 마치자 禮安에 사는 梧陰 成文夏(1638~1726)에게 業을 청하였다. 이에 성문하가 周易 한질을 주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서 보름 만에 다 베끼고 외울 정도였다. 1696년(숙종 22) 진사시 합격하였으며, 이해 겨울 영주시 북쪽 蘆峯山 아래 梧麓里로 이거하여 薪潭가에 簾閣을 축조하여 仲兄과 함께 경전을 강마하였다. 1708년(숙종 34) 문과에 급제하여 內贍寺直長이 되었고, 이듬해인 1709년 5월에는 西氷庫別提에 제수되었고, 7월에는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1710년에 경성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칠순에 가까운 老母 때문에 遞職을 올려 환향하였다. 1712년 정월에 咸鏡道都事에 제수되자 이번에도 노모 때문에 사직하려하자 모부인이 “두 번이나 연달아 사직하는 것은 직분이나 의리상 온당치 못하다.”고 해서 결국 부임하였다. 이때 關北의 故事‧都事‧評事가 南北道의 일을 나누어 관장하고 있었는데, 화재 때문에 문서들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에 그는 3일 만에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1720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쳤다. 1723년(경종 3) 5월에 병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으며, 그해 10월에는 옥천군수에 제수되었다. 1724년 봄에 沃川郡의 거듭된 화재로 인해 民家 600여 채와 公廨 수백여 칸이 모두 불탔으나, 1년도 안되어 정상으로 회복시켜 놓았는데, 1725년(영조 1) 봄 이조판서 閔鎭遠이 위배지에서 풀려나 돌아가다가 이 일을 전해 듣고 임금께 啓達함에 특별히 表裏(옷의 겉감과 안찝) 一襲을 하사하였다. 1725년 3월에 강릉부사에 제수되어서는 세금 때문에 유리걸식하며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탕감해주도록 하였으며, 또 이듬해인 1726년에는 대기근이 들자 비축해 두었던 곡식 三百斛을 풀어 구휼해 주기도 하였다. 1727년에는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고, 1728년 이인좌의 난이 발발하자 羅學川‧張后相‧鄭玉 등과 함께 豊基‧榮州‧順興의 士人들과 더불어 의병과 군량을 모아 난리 평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1735년에 제주목사 겸 호남방어사에 제수되어서는 사비를 털어 三泉書堂을 지어 제주의 백성들에게 학문을 진작시켜 주었고, 漁船을 축조하여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며, 제주도의 생산물과 육지의 쌀과 교환하여 대동미로 비축하여 어려운 시기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등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1737년(영조 13) 8월 제주목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육지로 나오기 위해 候風館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심한 바람 때문에 9월 3일 결국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 부고를 전해들은 英祖는 三南의 방백들로 하여금 특별히 喪行을 호송케 하여 12월 8일 順興으로 返葬하였다. 이후 그의 덕행과 치적을 기리기 위해 영주의 梧川書院과 제주의 象賢祠에 제향되었다. 再娶하였는데, 첫째 부인은 義城金氏로 學載의 딸이다. 아들 瑞節은 溫陵參奉을 지냈다. 둘째 부인은 全州李氏로 忠義衛 望雨의 딸이다. 맏아들 瑞必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둘째는 생원 瑞吉이다.